동국대학교 만해연구소 소장 고재석
정녕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인 듯합니다. 지난 2020년 겨울,『만해학술연구총서』(전5권)를 간행하면서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적을 때만 해도 이렇게 다시 인사말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만해연구소 사업은 만해축전의 일환인 학술대회와 만해한용운선양사업 지방정부행정협의회의 후원과 협조로 개척한 만해로드대장정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사로서의 기개와 절조, 선승으로서의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위한 노력, 위대한 예술가로서 황금의 꽃처럼 피운 그의 작품세계, 나아가 세계인 만해로서의 면모와 그 정신사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전으로 삼을 만한 『만해한용운전집』의 간행도 시급하고, 많은 연구자나 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해야 하는 등 가야할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 그의 말처럼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불리문자(不離文字)를 초월해야 하건만, 아직도 우왕좌왕하고 있는 듯하다. ―『만해학술연구총서』 전5권(2020.11.30) 간행사에서
앞으로의 과제만 남겨주고 떠났던 셈이지만 고맙게도 만해연구소에서는 위에서 말한 정본 전집 간행과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만해 선양사업을 필생의 과제로 삼은 독지가가 만해 아카이브 기금을 지원하는 가운데 학교 당국에서도 배려를 아끼지 않아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작업을 수행하고 있어 흐뭇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연구소를 다시 맡게 된 것은 누구보다 많은 아쉬움을 갖고 떠났던 만큼 과제를 잘 갈무리하고 회향하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번뇌를 끊고 영혼의 해방을 추구한 선승 만해, 훼손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개혁의 길로 뛰어들었던 혁명가 만해, 낡은 의미의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감성의 모국어로 현대시의 지평을 열었던 시인 만해. 그러나 우리는 환희의 선정(禪定)과 망국의 통한(痛恨) 사이를 넘나들며 운명의 형식을 완성해야 했던 그를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압니다. 정본 전집 마련과 아카이브 구축 사업이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디딤돌로 삼고 구성원들의 역량을 모아 개교 120주년과 『님의 침묵』 발간 100주년을 동시에 맞이하는 2026년 5월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갑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불교를 통해 자아와 세계의 혁명을 기획했던 만해의 꽃밭에서 그와 함께 황금의 향기를 맡고 들으며, 위대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시를 과제 수행을 위한 다짐의 인사로 대신하며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달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닭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에서